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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문체 분류 - 요내의 13분류

잉여인생 공부라도 하라지? 2017. 11. 14.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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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문체 분류 요내의 13분류

일반적으로 문학작품은 크게 산문과 운문으로 구분한다. 그런데 한문학에서는 이것을 구분하는 기준의 설정이 간단하지 않다. ()는 당연히 운문으로 분류되지만, 운문의 일종인 부()와 같은 경우는 점차 산문화 되어서 문장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또한 문장에서도 대우(對偶)를 사용하거나 압운(押韻)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역대의 문학이론가들은 산문과 운문 모두를 문장으로 간주하고 내용에 따라 분류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한문 문체 분류는 진()의 육기(陸機), ()의 유협(劉勰), ()의 소통(蕭統), ()의 정초(鄭樵), ()의 오눌(吳訥), ()의 서사증(徐師曾), ()의 요내(姚鼐) 등이 각각 주장한 바가 있다.

그 중에서 우리는 현재에도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청()의 요내(姚鼐)의 문체 분류를 따르고 있다. 요내(姚鼐)는 청나라의 고문가(古文家)이며, 고문사류찬(古文辭類纂)이라는 총 75권의 책을 통해서 문체를 분류하였다. 이 책에는 전국시대에서부터 청나라 때까지의 글이 문체(文體)에 따라 13가지로 나뉘어져 수록되어 있다.

 

논변류(論辨類)

姚鼐古文辭類纂에서 문체를 13가지로 나누면서 맨 먼저 論辨類를 배열 하였다. 이것은 그가 여러 가지 문체 중에서 論辨類의 문장을 중시하였음을 보여준다..

論辨의 명칭을 으로 분리하여 그 의미를 살펴보기에 앞서, 姚鼐古文辭類纂序를 참고 해보면, 論辨類春秋戰國時代 諸子의 출현에서 시작 되었다고 볼 수 있다. 論辨類는 그 源流를 설명하면서 후세에 가르침을 주기 위한 것으로 풀이하였다.

, 이라는 명칭은 論語에서 시작되었으며, 이치를 잘 파헤치는 것을 귀하게 여겼다.

孟子내가 어찌 따지기를 좋아하겠는가, 나는 그만둘 수 없기 때문이다.”고 말한 내용에서 취한 것이다. 宋代의 이기경(李耆卿)文章精義에서 맹자가 三綱五倫 안에서 의론을 세우면서 그가 다른 사람들과 따지는 것은 부득이한 것이다.고 하였다.

 

의 개념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보았고, 다음으로 論辨類의 체계와 구성을 모두 갖추었다는 墨子를 바탕으로 한 論辨類에서 주의해야 할 세 가지 기준을 말하자면, 첫째, 말에 근거가 있어야 한다. (이 말은 고대 제왕의 사적을 증거로 삼을 것을 요구한 것이다.) 둘째, 민정을 파악하여야한다. (이 말은 현실의 정황을 고찰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실용에 주의하여야 한다. (刑政에 유익하고, 국가백성의 이익에 유익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묵자 이외에도, 맹자나 장자 등이 논변류의 형성과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고한다. 그 중에서 맹자를 예로 들어 보자면, 맹자는 논어의 단순한 어록체에서 벗어나 대화식의 論戰性 문장으로 발전하였으며 규모도 커졌다고 한다. 특히 公孫丑 上에 보이는 그의 知言설은 논박과 관련한 명쾌한 견해를 드러냈다고 한다.

정리하자면, 論辨類는 춘추전국시대 논어에서 기원했다고 할 수 있으며, 본격적인 틀을 갖춘 것은 묵자 이후이며, 그 성격을 잘 드러내는 것으로는 맹자나 장자 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論辨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사리와 시비를 분석하고 議論을 통해 의견을 세상에 전하는 성격의 문체라 할 수 있다.

 

論辨類 에는 氣勢라는 것이 있는데 이에 대해 살펴보면,

첫째, 氣勢가 있어, 사람 마음을 두렵게 하고 굴복 시키는 예술적 매력이 있다. (이때, 기세는 이치가 곧아야 기세가 장하며, 기세는 과 짝하여서 생겨난다고 한다.)

둘째, 기세와 언어의 관계는 밀접하다. 그러므로 언어의 기세를 증강하기 위해, 작문 할 때, 긴 구절과 짧은 구절, 대우, 배비구를 역동적으로 운용한다. 혹은 어휘를 기민하게 조정해서 음절을 고르게 해서 리듬감을 증강시킨다.

 

기교로는 立意·破理·事類·形象·周密 가 있으며, 論辨類에 해당하는 문장은 ···(이 포함된다고 한다.

 

주의류(奏議類)

 

奏議類는 한마디로 신하가 왕에게 올리는 글이다. 대개 議論文 형식으로, 六朝 이후에는 거의 騈體를 사용 하여 지었다. 임금만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라, 공식적으로 상부에 올린 글들도 마땅히 이 부류에 속한다. 漢代에는 의 질서가 제정되면서부터 奏議類·· · 로 분류되었다. 은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는 뜻을 나타내는 데 주로 쓰였고, 는 죄과를 고발하는데 사용되었으며, 는 여러 가지 일을 요청할 때 활용되었고, 는 이의(異議)를 제기 하면서 붙이는 명칭이었다. , 奏議類는 기본적으로 上行(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올림)는 글에 해당하므로, 엄격한 요건을 가졌다. 曹丕(조비)전론·논문에서 주의는 우아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立意에서부터 措辭에 이르기까지 모두 고상하고 올바르며 규범에 합치하여야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주의류 산문의 명칭으로는 ····上書···封事·札子·(彈事·對策 등이 있다. 이상의 10종류는 모두 제왕에게 글을 올려 정사를 논하는 문체이며, 문장의 내용면에서는 논변류와 그다지 구분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 문체의 가장 큰 특징은 앞서 말했듯 글을 받는 대상이 제왕이므로, 내용에서부터 격식·어휘구사 등 모든 것을 근엄하고 신중하게 해야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서발류(序跋類)

 

序跋類에 대해서 姚鼐序跋類의 근원을 추론하길, 에 대한 과 같은 것을 의 시초로 삼았다. , 증국번(曾國藩)이란 자는 經史百家雜鈔에서 서발류는 다른 사람의 저작에다가 그 뜻을 서술하는 것으로, 繁辭禮記冠義·昏義와 같은 것이다. 그는 에 대해 다른 사람의 서적에 그 요지나 저술의 방법 등을 밝힌 것이라고 정의 내렸었다.

는 뒷날 서적이나 문장을 소개하는 글이나, 작가의 일생·사적을 소개하거나 저작의 동기·경위를 설명하거나, 저작의 내용·체제를 밝히고 평가하는 등의 글을 라고 부르게 되었다. , 는 처음에는 서적이나 문장의 뒷부분에 놓였으나, 뒷날에는 일반적으로 앞부분에 놓이게 되었다.

 

다음으로, 그 종류에 대해 서술하자면, 에는 두 가지 종류가 존재한다. 하나는 太史公自序와 같은 작가가 스스로 자신의 책에 를 지은 것이고, 또 다른 경우는 타인에게서 를 지어주길 청하여 얻는 것인데, 이것은 左思라는 자에게서 비롯되었다. 좌사는 三都賦를 지은 뒤, 그 당시 저명한 학자인 皇甫謐(황보밀)에게 를 써달라고 청하여 얻었다. 그 뒤로 문집에다가 남에게 를 지어 달라고 하는 것이 풍조가 되었다. 이 때, 남에게 를 써달라고 청하여 얻는 경우뿐만 아니라, 남의 문집을 편집하면서 를 작성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 는 작가 소개나 시문을 평론하는 문장이므로, 설명하는 문자 이외에 서사·의론·서정을 겸하는 일이 많다.

은 본래 에서 뜻을 취하여, ‘발로 밟는다는 뜻을 지녔다. 이 의미에서 파생되어, 뒤에 놓이는 것을 이라 부르게 되었다. 여기서 와 마찬가지로, 문체의 일종이다. 하지만 출현시기가 가 먼저 등장하였는데 나라 때, 이 등장하기 이전 시기에는, 가 책의 앞에 두기도 하고, 뒤에 두기도 하며 뒤에 둘 때는 後序 라 하였다. 의 출현 이후부터는 는 보통 책의 앞에 놓이고, 은 책의 뒤에 놓이게 되었다.

 

의 차이를 말해보자면, 는 자세하고, 은 간략한 편이다. 이에 대해 徐師曾(서사증)문체정변을 참고하면 그는 를 보충하기 위한 것이므로 이런 차이가 생긴다고 한다.

 

서설류(書說類)

 

姚鼐書說類를 정의 할 때, 奏議類와 구별하였는데, 奏議類의 경우 왕과 신하와의 관계가 성립하였을 때, 아랫사람이 위에 올리는 글을 奏議類라고 정의하였고, 遊說家(유세가)가 왕과 신하의 관계이 있지 않을 경우라 판단되는 경우에는, 書說類라고 분류하였다. , 이외의 書信을 통해 상호간의 의사를 전달하는 내용을 書說類라 하였으며, 공직에 있는 사람과의 書信이라도 公文이 아니라 私的書信은 모두 이 문체에 해당할 수 있다. , 개인 간의 글이기에 다른 문체류 보다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사상·학문·정치적 견해·경계 기타 등등)

 

서설류는 앞 서 말한 듯이, 글을 써서 서로 소식을 통하는 각종 편지글을 일컬으며, 실용산문의 한 유형을 일컬으며, 는 잘 아는 사이에 주고 받는 글을 일컬으며, ()주역-설괘에서 비롯되어 기쁠 열(,) 의미로, 해석과 서술의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서설류는 의리를 해석하고 자신의 의견을 기술하는 문체로서, 진솔한 표현·내용을 중시하는 설명적인 글이라 할 수 있다. 자기 마음 속의 말을 다 펼치고, 교묘한 표현을 통해 언어의 설득력을 강화시킨다.

 

서설류의 특징은 자신의 뜻을 상대에게 분명히 전함을 목표로 하는 실용성이다. , 개체성·진실성·서정성·표현방식의 직접성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개체성이란 작가의 사상·개성·기질이 잘 드러나 작가의 일생·사상이해에 도움이 됨을 말한다. 진실성이란, 이 문체가 평소 친분이 있는자에게 보내는 것이므로, 대부분 신뢰성·진실성이 드러남이다. 서정성은 개인감정이 편지에 드러남을 말하는 것이며, 표현의 직접성은 글쓴이와 대상의 관계(신분·지위·나이)에 따라 표현 방식 및 언어의 풍격을 달리함을 나타낸 것이다. 이런 특징들은 모두 사적인 관계에서 비롯된 성격들이라 할 수 있다.

 

증서류(贈序類)

 

贈序는 한마디로 송별할 때에 贈與하는 산문을 가리킨다. 떠나가는 이에게 贈與하는 전통은 예전부터 있어왔다. 예를 들어, 史記》〈孔子世家에는 孔子老子가 헤어질 때, 老子贈與하였다고 하는 기록이 있으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贈序晉代에 발단하여, ·때 형성되고 성행하였다. 唐代에 송별할 때엔, 여러 사람이 를 써서 贈與할 때, 특히 그 중의 한 사람이 여러 시의 를 지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시가 아닌 남의 贈與詩에 붙이는 詩序가 등장 하였다. 그리고 를 대신하여 贈序가 등장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한유(韓愈)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활용되었다. 예를 들면, 한유의 送孟東野序·送李愿歸盤谷序나 그 외에도, 유종원·구양수·이백·왕안석 등이 이로써 유명하다.

 

증서의 내용은 보통, 증서를 받는 이와 작가와의 관계·우의, 상대에 대한 기원·권면·관심 등을 기술한다. 하지만, 한유와 유종원의 경우, 이별정한을 서술하는 외에도, 이상과 포부를 펴고 정치를 의론하고 현실을 폐해를 탄식하고 공격하는 광범위한 내용·형식을 지닌다.

 

증서의 특징으로는 남에게 증여하는 작품이므로, 저술 대상의 구체적 상황에서 출발한다. 예를 들어 宋濂(송렴)送東陽馬生序는 작가가 동양마생(남경의 국자학의 학생)에게 준 이다. 이글은 상대방이 태학생이라는 데 맞추어 글을 쓰기 시작한다. , 찬양하거나 권면하기도 하며, 친구사이의 진지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하며, 의론·서사·서정을 할 수도 있으며, 표현수법이 상당히 융통적이다.

 

, 姚鼐가 택한 贈序중에는 壽序가 있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친구나 친척의 장수를 축하하는 것이 주된 목적으로, 간혹 한 두 가지 일을 들어 주인공의 업적을 부각시키고 그 의미를 두드러지게 하는 것도 있다.

 

마지막으로 그 명칭과 종류를 살펴보면, ‘서발류와 구별을 위해 보통 표제에 ㅇㅇㅇ·ㅇㅇㅇ·ㅇㅇㅇ시서등이라 쓴다.

 

조령류(詔令類)

 

詔令을 합하여 칭한 것이다. 한마디로 상급 부서에서 하급 부서로 내리는 公文이라고 할 수 있다. 詔書文體漢代의 것이 가장 淵雅하다. 고문사류찬에서 詔令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알리어 말하는 글을 칭하고 있다. 예컨대 天子諸侯에게 내린 명령문 등이다. 그리고 詔令과 비슷하게 관청에서 쓰인 것으로는 檄文이 있다. 즉 상부의 관청이나 고급 관리가 하부의 관청이나 하급 관리에게 내리는 모든 공문 형식의 글이다.

 

요내는 그 대표적인 문장으로 韓愈䲔魚文을 들고 있으며, 고문사류찬이외에도 문심조룡이나 경사백가잡초등에서 조령은 尙書에서 기원한 것이라 본다. 이는 본래 산문의 성격을 지닌 것이라 보고 있다는 뜻이지만, 이러한 종류의 글들은 공문의 성격을 띄는 것이기에, 순문학과는 거리가 먼 非散文文學에 속하는 것이다.

 

조령체 산문의 명칭은 周秦 이후 明淸에 이르기 까지 아주 많다. ··(····등이 있고, 이외에도, 批答·赦文··九錫文·鐵券文 등 다양한 명칭이 그 내용에 따라 구별되어져있으니, 크게 임금이나 조정에서 하부에 내리는 글이라는 점에선 동일하다.

 

전장류(傳狀類)

 

傳狀類는 개인 생애의 자취를 기술한 문장으로 죽은 이의 행적을 적는 것이 일반적이다. 傳狀類史記·漢書등에서 비롯되었다. 史記項羽本紀·孔子世家·准陰侯列傳등은 모두 에 포함되는 것이다.

 

전장류는 行狀을 합친 것이다. 行狀도 인물의 행적을 기록한다는 것에서 과 맥락을 같이 한다. 다만 그 용도와 작법에 있어 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은 기전체 역사서술방식에서 비롯되었고, 사람들의 사적을 적어 후세에 전하려는 목적이 있다. 은 죽은이에 대한 실록이다. 대상의 가계·이름·생년월일·관적·행적 등을 소상하게 썼다. 그러므로 사실에 의거해야 하며, 객관적으로 냉철하게 서술해야했다.

 

전장류의 특징은 대상인물의 사실에 충실했다는 점, 역사적 진실을 존중한다는 것에는 인물에 대한 작가의 평가도 포함되며, 인물의 출신·사회적 지위를 서술함으로써, 성격이 형성된 역사적 배경·사회적 배경을 제시했다.

 

전장류에 해당하는 문체로는 전·가전·보전·소전·별전·행장··사략·세가·실록 이 있다.

 

비지류(碑誌類)

 

碑誌類碑銘墓誌銘을 포함하고 있다. 碑銘金石이나 건축물에 새길 것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서 그 범위가 매우 넓다. 진시황(秦始皇)泰山刻文· 반고(班固)封燕然山銘등처럼 封禪(봉선)이나 功績을 기록한 刻文, 한유의 南海神廟碑와 같이 사찰이나 道觀·橋梁 등의 건축물에 새긴 문장도 여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墓碑는 죽은 사람의 생전 행적을 기록한 것으로 문장의 맨 끝에 이 붙어 있다. , 요내는 碑誌類詩經를 바탕으로 공덕을 刻石한 글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여기서 고대의 제왕의 공덕을 기록할 때에는 주로 기명위에 명문을 새겼었다. 하지만 이 것 만으로는 부족하여 석비로써 대체하였고, 이때 비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한데다가 명산이나 종묘에 세워 위엄을 드러낼 수 있기에 많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지의 경우는 돌에 새겨 땅에 묻는 비석을 말한 것이다.

 

비의 종류에는 비를 세우는 지점과 기능의 차이에 따라 산천비·성지비·궁실비·교도비·신묘비·가묘비·고적비·공덕비·사관비 등으로 나누고, 그 외에도 묘도비·묘표·묘지명 등을 들 수 있다. , 비지류의 문장은 비를 세우는 장소와 기능에 따라 종류가 나뉘는데 크게 기공비(주로 공덕을 기록궁실신묘비(궁실신묘를 건축하는 연유·과정·규모·주관자 기록묘비문과 묘지명(죽은이의 생전 사적-성씨·본관·일생 등을 기록)으로 나눈다.

 

잡기류(雜記類)

 

雜記의 내용은 매우 복잡한 것으로서 記事記物에 관한 문장을 모두 포괄한다고 할 수 있다. 요내는 고문사류찬서에서 雜記類碑誌類와 구별하여 서술하고 있다. 잡기류 문장은 크고 작은 일들을 기록하는 글이다. 그 내용이나 형식도 특별한 제한을 받지 않고 매우 다양하게 발휘될 수 있기 때문에 사용 범위가 대단히 광범위 하다. 그러므로 대상을 보고 느낀 점과 자신의 사유를 일정 양식으로 기록하는 잡기로 이루어졌다. 이 점으로 인하여 발전해 문학적 감상과 예술적 표현이 고도로 표출되어, 잡기류 산문에는 문학성 작품이 뛰어난 작품이 많이 생겨났다.

 

잡기류의 종류는 기록 대상에 따라서 기사·기물·기경으로 나뉜다. ‘기사는 인물 사건에 관한 사실·경위를 중점으로 기술한다. 그러므로 작가의 의견이 개입되기 마련이다. ‘기물은 특정 사물을 묘사하는 것이며, ‘기경은 산수·자연을 중점적으로 묘사한다. 유람하며 보고 들은 것들을 기록하며 풍광을 묘사하기도 한다.

 

잡기류 에는 돌에 새긴 것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돌에 새기는 경우는 文辭運用碑誌類와 방법상의 비슷함을 느낄 수 있으나, 그 내용이나 목적으로 들어가면 碑誌類 문장이 사실의 기록이라는 점에 그 한계가 분명히 있다. 雜記文의 특색은 敍事에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예외도 존재하는데, 蘇轍怏哉亭記范仲淹岳陽樓記가 해당된다.

 

잠명류(箴銘類)

 

箴銘類는 스스로 다스리고 경계하는 데 쓰이는 문장으로서 대부분 자신을 경계하고 勸勉하는 데 사용하였다. 은 곧 으로, 질환을 치료하고 예방하는데 사용되므로 잘못을 고치는 의미로 쓰였으며, 또 찢어진 물건을 깁는 도구이므로 결점을 보완하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規戒의 의미라 할 수 있다. 이에 옛사람들은 남이나 자신을 규계하려는 목적의 문체를 잠문이라 부른 것이다.

 

이러한 에 대해 요내는 ··周 三代부터 그 문체가 존재하였다고 말했다. 左傳에 보면 그 흔적이 약간 보이고, 狩獵의 잘못을 간한 吳人이 그 형식과 내용을 가장 잘 갖추었다. 전국시대 이래로 그 형식이 점차 희미해졌으나 揚雄에 이르러 다시 활성화되어 지방장관에 대한 25편을 지었는데, 崔駰·胡廣 등이 이것을 增補하여 百官으로 편찬하였다고 한다.

잠문의 종류에는 경계하는 대상을 두고 말하는 경우 官箴·私箴 두 가지가 있다. 관잠은 주로 신하가 군왕 혹은 조정의 속관에게 규탄·권면하는 글이며, 사잠은 자기 자신에 대한 경계하는 길이다. 관잠의 경우의 예시로 虞箴·女史箴등이 있고, 사잠의 예시로는 한유의 五箴이 있다.

 

이러한 은 자신이 경계하고 銘心하기 위한 내용을 기록한 글이기 때문에, 굳이 화려한 文辭로 수식할 필요가 없어 문장은 질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文辭의 수식이 없고 문구도 간결하여, 그 의미는 지극히 함축적인 경향이 많다. , 풍간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읽어서 입과 귀에 순하며, 기억하기 편하도록 보통 4언을 위주로 하여 운문으로 작성된다.

 

銘文은 기물이나 비판 위에 새기며, 본래는 기명, 물주명 혹은 기물의 제작자, 제작시기등 간단한 것을 기록하였으나, 점차 변한 것으로 보인다. , 그 기능은 경계 혹은 공덕을 기록하는 것이다.

 

銘文의 종류에는 경계를 하는 글이든 공덕을 기록하는 글이든 간에 새기는 곳에 따라 器物銘·居室銘·山川銘·碑銘 등으로 구별 할 수 있다. 기물명은 鍾鼎····등에 새기는 명문을 가리킨다. 거실명은 대문이나 방벽 위에 새기는 명문이며, 대표적으로 陋室銘을 예로 들 수 있다. 산천명은 명산대천이나 명승고적에 새기는 명문을 가리킨다. 이 경우에는 자연을 찬미하는 대용을 더하기도 한다. 비명은 비석에 새기는 명문으로, 주로 찬송 위주이며, 형식·내용적인 면에서 송찬류와 다름없다. 이외에도 座右銘이 있는데, 이는 좌석 가까이에 써두어 스스로 경계하는 것을 일컫는다.

 

마지막으로, 명문과 잠문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보면, 두 가지 경우 모두, 대개 이 있다. 하지만, 명문의 경우 당송고문가에 이르러 을 결합하여, 일반 산문과 차이가 없는 글도 존재한다. , 유협의 문심조룡을 참고해보면, 그 차이를 지적하는데 잠은 과실을 미리 막으려는 목적의 글이므로 확실하고 적절하여야 하지만, 명은 찬양을 겸하므로 내용이 풍성하고 규모가 커야하는 점을 들었다.

 

송찬류(頌讚類)

 

요내는 증국번이 분류한 辭賦類 안에, 辭賦·箴賦·頌讚을 모두 포함시킨 것은 作文의 내용이나 취지에 있어서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다시 세분화 하였다.

頌讚類의 문장의 구성은 앞에 를 두어 충분히 활용하는 경우가 많으며, 그런 후에 韻文頌辭讚辭를 쓴다. 따라서 그 구성에 있어서는 箴銘이나 碑誌와 유사한 일면을 지니고 있다. 사실 頌讚類箴銘과 마찬가지로 古詩의 한 支流였던 것이 변하여 문장의 성격을 갖추게 된 것이다.

요내는 고문사류찬에서 頌讚詩經에서 발전된 것임을 밝히고 있을 뿐 자세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唐代에 이르러 試題로 쓰였다고 하는데, 이는 詩賦的인 특성을 말해준다. 그 용도(用途)나 내용에 있어서도, 살아 있는 인물이나 雜事, 死者에 대한 哀贊, 그리고 과거 歷史人物에 대한 평가 등을 포함하고 있다.

 

송찬류에서의 은 시경의 육의 가운데 하나이며, 후대에 와서는 왕이나 대상의 성덕을 칭송하는데 쓰였다. 이는 죽은 자의 생전 공적을 그의 영혼에게 아뢰는 방식이었으며, 자손들에게는 효성을 일깨워주고, 신하들에게는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였다. 은 본래 신명에게 남의 좋은 점을 고하던 것인데, 대상의 덕을 찬미하는 것을 변하였다.

 

송의 형식은 4언체에, 격구압운 형식을 취하며, 전아하고 장중한 문체이다. 찬은 매구가 4언격구이며, 그 종류는 1.잡찬(인물·문장·서화를 찬미) 2.애찬(사람의 죽음 애도, 그의 덕을 기림)

3.사찬(인물의 잘잘못에 포폄을 가해 논평을 하는 것)이 있다.

 

사부류(辭賦類)

 

辭賦總稱이다. 楚辭漢賦를 주된 근원으로 하여 일정한 특색을 지닌 文體를 포괄적으로 지칭한다. 그런데 漢賦는 결국 근원을 楚辭에 두어 발전된 것이므로, 漢代에 이르러 이들을 구분하지 않고 합하여 辭賦라 부르게 되었다.

 

는 초나라 때 애국시인 굴원이 지어낸 시 형식으로, 시경의 현실주의적 전통을 계승하였으되, 풍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적극적 낭만주의 창작방법을 고안해냈다. 초사는 詩經4언체를 타파하고, 5·6·7언 등을 적절히 섞어 자유롭게 운용한 산문화된 長句로 대신하여, 언어면에서 상당히 많은 虛詞(특히 ’)를 운용하였다. 아울러 시형식의 篇章 구조를 확대하여, 혹은 서정에 서사를 겸하거나, 혹은 서정과 영물에 의론을 겸하는 등, 鋪敍敍事 등의 산문 성분을 대대적으로 강화하였다.

 

는 생성과 발전에서 초사의 영향을 받았다. 시경에서 사실을 포진하는 의 창작방법을 계승하고, 초사에서 장편 구성과 화려한 사조로 사물을 그려내고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감정을 풀어 보이는 특징을 흡수하였다. 하지만, 차이도 있는데 가 어기사인 를 첨가하여 성음을 조절한다면, 는 산문화된 구식(접속사나 구말어)을 사용한다. , 초사는 연결어를 극히 드물게 사용하지만, 부는 산문과 같아, 연결어인 是故·然則·若夫·且夫··등의 글자를 많이 사용한다.

이상을 정리해보자면, 시경보다는 초사에 산문적 요소가 많고, 초사보다 한부에 산문성이 강하다는 것이다. , 부의 종류로는 크게 고부·배부·율부·문부로 크게 나뉜다.

 

앞서 말했듯이 초사와 한부의 성격을 띤 문체를 아울러서 사부류라고 부르게 되었다.

 

애제류(哀祭類)

 

哀祭類의 글은 한마디로 死者에 대한 哀痛함을 표하거나, 祭祀를 지낼 때, 追慕하는 마음을 표하는 글이다.

 

이것의 종류에는 세 가지 體裁가 있는데, 哀辭·(·祭文이다. 哀辭는 본래 夭折哀悼하는 글이다. 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본래 윗사람이나 어른이, 아랫사람이나 젊은이에게 쓴 것이다. 이것은 家系生前事蹟을 기록하고 또 哀痛함을 표한 글인데, 이를 통하여 시호를 확정하였다. 후일에는 그 上下貴賤에 관계없이 쓰이게 되었다. 그 기록에 대해서는 무릇 두 가지가 左傳에 보이는데, 하나는 晉莊公之縣賁人父이고 또 하나는 魯哀公之誄孔子이다. 弔文에 대해서 說文解字問終으로 해석하면서 葬事때 손에 활을 들고 동물을 내쫓는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弔文은 죽은 사람을 哀悼하는 글이다. 여기서 조문은 제문과 동일하게 죽은 망자를 애도하는 것이지만, 차이가 있다면 조문은 옛 사람을 조문하면서 현실을 슬퍼하는 것이다. 祭文은 죽은 사람을 祭祀지내는 글이다. 다만 祭文은 그 靈魂祭祀를 흠향하도록 朗讀을 위주로 지은 것이며, 그 대상에 특별한 제한은 없다. 그리고 앞서 말한 조문과의 차이는 제문은 대개 당시 사람을 제전하는 것이다.

 

애제류의 특징에 관해서 유협의 문심조룡을 참고하면, 애제류 문장의 제작은 감정면에서는 애상을 위주로 하고 조사에서는 망자를 가련히 여김을 위주로 한다. 만일 부화한 어휘표현으로 애사를 지으면, 비록 화려하나 결코 애통하지 않아 좋은 애제문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단지 감정의 이르러가는 바에 따라 자연스레 비애에 젖게 하여 남을 감동 시켜 눈물 흘리게 하는 것을 좋은 애제문 이라 하였다.

 

애제류 중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文體에 포함 시키는 것이 합리적일 때도 있다. 예를 들어, 는 순수하게 哀痛함 만을 나타낸다면 애제류에 포함시키는 것이 마땅하나, 家系生前事蹟을 기록하는 부분이 부각된다면 碑誌類에 포함시키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